1) 선조시기
누르하치는 선조 22년인 1589년에 건주삼위 전체를 통일하였으며, 1591년에는 두만강 유역의 여진인 일부를 복속시켰다. 이때 조선의 번호였던 여진인의 상당수가 건주여진에 속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중, 건주위 여진인들이 산삼을 캐러 조선의 영내에 들어왔다가 죽는 사건이 생겼다. 이때
누르하치가 이끄는 건주여진이 주변의 여진 부족들을 아울러 세력이 점차 강성해지면서 달라져갔다.
그들의 강성함을 인식하면서 조선은 명과의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고심하였다. 대표적인 것의 광해군의 중립 외교 노선이다. 그러나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물러난 이후 대 후금 정책은 변
광해군은 중립외교 정책, 이를 뒤엎은 인조반정과 이어진 이괄의 난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네 가지 배경에 대해 알아보겠다.
1. 동북아 정세의 변화
임진왜란(1592~1598) 이후 동북아 정세는 크게 변화한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후금의 등장이다. 건주여진의 추장이던 누르하치는 임진왜란으로
때문에 여진이 조선을 침공한다면 상당히 버거운 조선의 입장 때문이다. 그래서 광해군은 국제 정세를 능동적으로 파악해 명의 요구에 따라 강홍립이 이끄는 원군을 파견하긴 했지만 , 광해군은 상황에 따라 행동하라는 밀명을 내려 후금에 투항하도록 함으로써 실리적인 중립 외교 정책을 취하였다.
후금(後金)이라고 하고 누르하치는 ‘왕’이라 칭함.
② 국내 -전후 복구사업
○ 조정은 동인, 서인, 북인, 남인으로 분열.
○ 전쟁으로 인해 전국토가 황폐화 백성들은 생활고(生活苦)에 시달림.
○ 재정적으로 많은 어려움, 전쟁 이전으로의 복구가 시급한 상황.
2. 즉위과정
○ 1575년 선조의 후
복구 시급
2. 즉위과정
- 선조의 후궁인 공빈(恭嬪) 김 씨의 소생
- 친형님인 임해군을 둔 둘째 왕자
→ 임금이 될 수 없는 처지, 명나라에서 세자로 인준해주지 않음
- 신하들이 광해군의 세자 책봉 주장, 선조의 거부
-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가 광해군을 왕세자로 채택
광해군, 결과적 시각으로만 보면 그는 분명 ‘패배자’였다. 왕위에 있으면서 아무리 탁월한 치적을 남겼다고 하더라도 왕위를 빼앗긴 일차적 책임은 분명 그 자신에게 지울 수 밖에 없다. 광해군의 몰락은 왕권과 신권의 대결에서 왕권이 패배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선조 즉위 이래 관행으
1. 근세의 세계
14세기 후반 중국에서는 명이 건국되어 전통적인 한문화가 회복되었다. 명대에는 강력한 전제 황권이 확립되고 서민 문화가 발전하였다. 명은 15세기 초 대외적으로 팽창하여 인도양과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국위를 떨쳤다. 이 때부터 중국인이 동남아시아 지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후금과의 관계에 있어서 인조의 태도이다.
특히 인조는 외교정책에 있어서 안일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 예로 들면 인조는 즉위 초반 친명배금을 주장하며 전왕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비판하면서 정국에 출범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후금의 경계를 불러일으켜 결국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바로 후금과
1. 광해군의 집권과정 및 상황
1-1. 광해군의 출생
광해군은 선조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혼이고 후궁
공빈 김 씨가 어머니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광해군
과는 다르게 왕자들 중에서도 특히 품행이 바르고 효
성이 지극했으며, 학문이 독실한 것으로 밝혀졌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면,
'선조가